픽션들 독후감, 보르헤스, 틀뢴, 나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 책, 독서, 서평
- 2022. 7. 30.
보르헤스, 픽션들
<픽션들>은 제목 그대로 허구이다. 이 작품은, 가상의 작가의 가상의 작품에 대한 논평, 가상의 공간, 가상의 인물에 대한 전기 등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는 모순적이면서도 정답이 없는 문제들을 짚어나가는, 통찰력을 읽을 수 있었다. 작품들은 연관이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개별적이었다. 많은 의문점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던 단편들 속에서 다가왔던 하나의 질문은 ‘인식’의 문제였다. 픽션들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짐짓 낯설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낯섦’속에서 역으로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돌아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백과사전을 통해 만들어진 ‘틀뢴’이라는 세계에는 명사가 없다. 명사는 형용사들의 연속이나 비인칭 동사들로 대체된다. 틀뢴이 바라보는 세계는,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와 다를 것이다. 틀뢴을 구성하는 것은 공간보다는 시간이다. 특히 역사에 관한 인식이 인상적인데, 틀뢴은 미래 못지않게 ‘과거’ 역시 ‘유연한’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고고학자들은 유물들을 조직적으로 취사선택함으로써 과거를 구성하고, 변형시킨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는 현재적 기억일 뿐이며, 조작되고 훼손된 기억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기억의 불완전성과 조작과 훼손이, 우리가 ‘사고’를 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순간 기억능력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만큼 그는 차이점만을 인식할 뿐, 공통점을 묶는 일반화를 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유연한’시간은 다른 작품에도 등장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은 직선적이고, 선택적이다. 그러나「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와「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그와는 다른 그물망과도 같이 겹겹이 쌓여있는 대칭의 다른 시간들을 보여주었다. A라는 행위가 있다고 했을 때, 그 행위가 있기 까지 ‘있을 수 있는 과거들’과 A라는 행위 다음에 올 수 있는 끝없이 이어지는 미래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는 그 득실거리는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시간 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라는 인식. 그렇게 생각하면, 무한하고 까마득한 전체 ‘시간’속에 나는 단지 점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조차도 기억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이 상황을 존재하게 한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는 어떤 시간 축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작품이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삐에르 메나르는 『돈키호테』I부의 9장과 38장, 22장을 똑같이 쓴다. 그리고 텍스트 언어상으로 한자도 다른게 없이 똑같은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삐에르 메나르의 텍스트가 다르게 읽힌다고 말하는 역설한다.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세르반테스의 관점으로 ‘돈키호테’를 보는 것과, 20세기의 작가가 ‘외국어’인 스페인어로 돈키호테를 썼다고 생각했을 때 보이는 ‘30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같은 텍스트를 더 풍요롭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분명히, 세르반테스의 시대 상황으로 비추어서 세르반테스가 그렇게 의도하고 쓰지 않았을 문장도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열려있고, 개입할 수 있는’, 결론이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는 문학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느 시대에 읽어도 그때마다 밑줄 치는 부분이 달라질 수 있는 책,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날이 두꺼워지는 책을 고전이다. 삐에르 메나르는 ‘고의적인 잘못된 원저자 설정, 시대교란’이라는 방법을 통해 고전의 두께를 더한 사람인 것이다. 어떤 상황을 배경으로 어떻게, 어떤 사람이 읽는가에 따라서 같은 내용도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읽기>의 중요성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삐에르 메나르가 한 행위가 ‘창작’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창작’이라는 행위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바벨의 도서관」의, 책들은 모두 유일 무의하지만 단지 글자하나, 쉼표 하나가 다르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건 틀뢴에서는 모든 작품은 한 작가의 무시간적이며 익명이라는 이야기와도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물다섯 개의 철자로 이우어진 무한하면서 동시에 유한한 책들. 그 사이에는 그 어떤 무질서 속에서 똑같은 책들이 반복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자체가 ‘얼마나 새로운가’보다는 그를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는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쓰였든 현재에 다시 쓰였든, 우리의 기억과 사고가 불완전한 만큼 그것은 언제든 다시 새롭게 읽힐 수 있기 때문에, 시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 속에서 그 작품을 만났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번에 ‘우연히’ 보르헤스의 책을 만났듯이.
'책, 독서,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프카 굴, Der Bau, 독일 문학, 독문학 (0) | 2022.08.04 |
---|---|
안티고네, 소포클레스 - 안티고네에게 가해진 이중의 멍에와, 안티고네의 저항 (0) | 2022.08.03 |
카프카 소송, 카프카 심판, 들여보내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문지기 (0) | 2022.08.02 |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 부재로서 현존하는 기다림 (0) | 2022.08.01 |
댈러웨이 부인 해석 문체 번역, 델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방식, ‘나’를 살아있게 하는 방식 (0) | 2022.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