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 부재로서 현존하는 기다림
- 책, 독서, 서평
- 2022. 8. 1.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나는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을 두 번 보았다. 한번은 유명한 임영웅 연출의 산울림 소극장 공연이었고, 또 하나는 off대학로 공연이었다. <픽션들>을 쓴 보르헤스는 사무엘 베게트의 이 작품이 길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1막과 2막의 구성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1막과 2막의 동일하면서도 조금 다른 이 구성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작품이 일반적인 소설이 아니라 상연을 목적으로 한 희곡이라는 점이다. 물론 책으로서 이 작품을 읽었을 때에도 공감이 가는 많은 대사들과 내용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지만, 역시 공연으로 보았을 때의 즐거움은 글줄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두 공연을 비교해보기만 하여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산울림의 공연이 베게트의 작품을 ‘정석’대로 무대에 재현했다는 느낌이었다면 off대학로 공연은 색달랐다. 배경을 정신병원으로 설정한 것은 물론이오, 고고와 디디는 한 여성 정신병자가 혼자서 정신분열 환자처럼 연극놀이를 하듯이 왔다 갔다 하는 인물들이 되어있었고, 포조는 의사, 럭키는 간호사로 이 환자의 연극놀이에 참여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런 두 공연이 주는 느낌은 상당히 달랐고, 이렇게 공연을 통해서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로 완성될 수 있다는 점은 연극만이 가진 매력일 것이다. 그리고 연극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인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벌어지는 생동감과 ‘제한된 시간에의 상연’이야 말로 이 작품에 더할 나위없는 생기를 불어넣어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제한된 시간’동안 눈앞에서 벌어졌던 그 ‘기다림’을 고고, 디디와 함께 피부로 느낌으로서 감동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공연에 몰입하게 되면 어느덧 그들과 함께 오지 않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 저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하면서.
1막과 2막의 동일한 구성이 중요하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 1막을 보면서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다. 조각 조각난 채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말들, 특별한 사건의 전개가 있다기보다는 상황 상황에 맞춰 그저 떠들면서, 그것도 특별히 소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허공에 떠도는 듯 한 말들을 내뱉으면서 이루어지는, 대상도 이유도 분명치 않은 지루한 기다림에 공감이 간다고 하기 보다는 당혹감과 낯설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당혹감은 똑같은 2막을 보면서 어느새 친근감으로 바뀌었는데, 바로 그 1막에서 ‘추상적이었던’ ‘기다림’이 ‘어제보다(인지 언제인지 모를 1막보다)’ 한층 더 지루해지고 힘들어졌다는 무게감을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하여 어느새 익숙해진 극중 배경과 인물들에 점점 동화되어가면서 어느새 나도 고고, 디디와 ‘함께’ ‘오늘도’ 오지 않을 듯 한 고도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이야기의 반복구조가 지루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선하고 익숙함 덕분에 정겹기 이를 데 없는, 신기한 경험을 하면서. 그리고 고도가 다시 소년을 통해서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는 말만 전하고 나타나지 않았을 때, 디디와 고고가 자살을 생각하다가 내일의 기다림 혹은 자살을 기약하면서 함께 돌아가는 모습은 어딘지 짠하게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시 보더라도 이 작품이 여전히 짠하다. ‘기다림’은이라는 본질에 대한 ‘질문’은 언제 어떤 형태로 있던지 마음속에 파고들기 때문이다. 지하철 1호선이라는 공연의 ‘기다림’이라는 곡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일지도 모르겠다. 기다림에 대한 그 ‘짠’한 느낌은 어딘지 서글프면서도 또 뭉클한 그런 감정이다. 이 작품은 확실한 시간도, 공간도 설정되어 있지 않고, 2막에서의 ‘내일’이 정말 ‘내일’인지 조차도 모호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불확실한 점들 덕분에 언제나 국적과 문화와 환경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랬듯, 누구나 디디와 고고의 모습에서, 혹은 포조와 럭키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디디와 고고의 기다림은 작품이 쓰여 진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현재’의 기다림이고, 앞으로도 이어질 끊임없는 ‘현재진행형’의 기다림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기다린다. 수업이 끝나기를, 빨리 레포트를 다 쓰기를, 방학이 되기를, 점심시간을, 퇴근시간을. 미래를 향해 현재를 비축해두라는 말은 늘 듣는 말 중에 하나다, 그러면 나중에는 더 나을까, 나을까, 하며 현재를, 더 나은 미래를 기다리는데 쓴다. 그런 시간은 사실 비어있다. 아무것도 없고, 공허하다. 그리고 그 공허함에 짓눌려있는 시간은 한없이, 한없이 더디게 흘러간다. 왜냐하면 사실 ‘기다리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허라는 말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이다. 모순적으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다. 고고와 디디의 툭툭 내던지는 허공에 떠도는 듯한 대사들, 2막의 놀이는 그러한 것을 단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무얼 하지 않으면 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서 그들은 달려보기도 하고 걸어보기도 하고 얘기도 해보지만 그래도 그들의 마음은 공허하다. 시간도 목적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상도 불확실한 기다림은 끔찍하다. 무기력하고 무의미하게 다가오는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든 메워 나가야하는, ‘삶’을 향한 기다림은 ‘죽음’을 향해서까지도 이어진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매일 죽는 것은 아닐지. 막 마지막의 ‘자살시도’와 ‘죽음의 유예’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디디와 고고가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일단, 고도가 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도가 오면 무엇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작품 속의 ‘고도’가 누구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도 모른다고 했다 한다. 대신 관객들은 스스로 ‘고도’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하고 수많은 해답을 찾는다. 보는 사람에 따라 ‘고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다. ‘고도는 이것이다’라는 정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시각으로 보는 ‘고도’가 중요한 것이다. 나는 ‘고도’는 어쩌면 ‘기다림’ 자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도’는 오는 순간 더 이상 ‘고도’가 아니고, ‘고도’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오지 않은 새로운 ‘고도’가 생길 것이다. 고도는 不在로서 現存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는 삶’은 사실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에스트라공도, 블라디미르도, 포조도, 럭키도 사실은 나의 다른 모습이 아닌지. 하루하루를 유예하면서, 또 다음날도 비슷한 하루가 반복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그러나 ‘그래도 혹시나…….’하는 기대를 안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어렵지 않게 나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고 그 ‘부재’로서 ‘현존’하는.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공허’는 늘 마음을 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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