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있다’라는 것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것은, 순간순간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는 이에 대한 대답을 ‘의식’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는 ‘내’가 진정한 ‘나’의 모습인가. ‘나’는 고정된 실체인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인가. 순간순간의 다른 기억의 단편들 속에서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나’로 엮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끊임없이 머릿속을 떠다녔던 생각들이다.
찰나의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생각들이 오간다. 어떤 고민을 할 때조차 나는 의식적으로 일관된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으려 노력하지만, 그 틈새에는 그 생각으로 인해 연상되는 새로운, 전혀 상관없는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수록 ‘독서’를 집중하지 않으면 잘 못하게 되었는데, 책을 읽다가 어느 구절, 내가 경험했던 그 어떤 사건을 연상시켜주었던 구절, 평소에 고민했거나 생각했던 주제가 은밀히 내비쳐지는 구절, 혹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전혀 상관없지만- 나에게만은 그 어떤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구절들을 만나면 이내 책에서 딴 세계로 빠져들어, 정신을 차리면 그 한 줄을 벗어나지 못하고 멍하게 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정말 뇌 속의 구조라는 것은 정말 신비로워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예상치도 못했던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어? 그런데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하고 더듬어 보면 처음에 고민하던 완전히 다른 주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그 꼬리를 찾을 수 없어서 당황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아, 그런데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할 얘기 있었는데...”라며 고민할 때가 그런 경우이다.
이 <댈러웨이 부인>은 그런 생각의 흐름, 의식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그것도 한 사람의 생각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이사람 머릿속에서 저사람 머릿속으로, 또 다른 사람 머릿속으로 옮겨 다니며 떠다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한 경험은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었는데, 같은 사물과 사건이 있었을 때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들은 현실에서처럼 전혀 일관성이 없고 어느새 다른 사물이 눈에 들어오면 다른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대로 논리적인 개연성은 없게 넘나든다.
우리는 ‘행위’중심의 서술에 익숙하다. 신문에 나오는, 철저하게 육하원칙을 지키며 쓰여 진 얘기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였는가 하는 종류의 서술들 말이다.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런 ‘행위중심’의 소설이 있는 그대로의 ‘사건’과 ‘진실’을 드러내는데 적합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이건 예전에 울프의 다른 소설인 <올란도>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가 존재하는 방식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지금 컴퓨터에 앉아서 레포트를 쓰고 있는 ‘내’가 다가 아니라, 사실은 머릿속에서 ‘아, 아침을 늦게 먹어서 배고프다. 빨리 써야지. 오늘 연극 연습은 어떻게 할까.’같이 수만 가지 잡생각들을 하고 있는 그 서술들 자체가 어쩌면 ‘나’를 더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일상 속의 생각이나 대화는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서술들처럼 깔끔하고 논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무척 혼란스럽고 일정한 방향이 없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온갖 생각의 경우는 물론이고, 만약 내가 친구와 하는 대화를 녹음한다 할지라도 그 ‘맥락없음’에 놀라게 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생각의 많은 부분을 그 상황에 따른 분위기와 과거의 경험 등에 비추어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을 끊임없이 넘나들고 넘나들면서. 그렇다면, 오히려 기승전결이 뚜렷한 구성보다는 이러한 구성이 오히려 ‘현실’을 여과 없이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요한 것은 댈러웨이 부인이 어디에 갔고 누구를 만났고 뭘 했고, 자살했다, 라는 행위들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하면서 동시에 전개된 일련의 머릿속의 과정인 것이다.
의식이 정지하면 ‘내’ 존재 역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일관되지도 않고, 어디로든 마구 넘나드는 그 의식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순간순간 속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혼란스럽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붙잡고 있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내 눈에 보이고 있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의식하고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차창 밖으로 쉴 새 없이 지나가는 풍경들만큼이나 어지럽다. 이러한 생각들은 울프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가벼운 현기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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