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강산무진, 김훈 - 말해보렴, 기원화

김훈, 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죽어가는 가운데, 그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과 증거는, 행동들은, 망막에 맺혔던 무수한 영상들과 고막을 떨었던 수없는 울림들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시간이 흐르고 자신이라는 존재가 사라지게 되면, 아마도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는 아주 희미하게 남거나 아예 없어질 것이다. 다만 흙속에 육체가 녹아들고, 대기 속에 내 폐 속에 들어갔다 나온 공기가 자리하는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김훈의 <>를 읽으며 유물 몇 점이나 뼈는 그 물건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 의해 쓰였는지,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어떤 인물인지 말해주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기원리는 버려진 장소이다. AD 4년에 기원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기록을 제외한다면 늘 철거민들이나 향토사단들이 잠시 거주하는 임야지대로 분류되어왔다는 기원리를 보며, 누구에게도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고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을 소외된 장소라고 느꼈다. 그렇다고 기원리는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랬다면 아름다운 자연과 향취라도 남아있을 텐데, 산들은 야위어 다른 곳으로 내달리고 물은 난잡하게 흐르고, 곳곳에 쓰레기가 가득하고 컨테이너로 지은 집이 있어 더욱 초라한 황무지같이 보인다. 유일하게 전시실에 전시된, 원래 발굴하려던 AD 4세기의 유물들과 관계도 없는 AD 6세기 여자의 골반뼈 기원화의 아이러니야 말로 기원리의 특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것 같다. 생명에 대한 상상력을 일깨워준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신빙성 없는 추측을 덧붙여 전시된 기원화, 그렇게 왜곡되고 덧칠해져 그 여인의 생애와는 무관하게도 전시실 한 구석에 자리잡아버렸다. 전시되지 못한 AD 4세기의 무수한 남자 뼈들을 제쳐두고라도, 거창한 듯 전시된 기원화의 모습은 제자리가 아닌 듯 외롭게 느껴진다.

김교수오만석은 역사, 혹은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서로 다른 관점을 보여주었다. ‘김교수()’는 다소 방관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증주의적 방식을 긍정하지 않으면서도 시키는 대로 발굴에 참여하고, 기원화를 다소 억지스럽게 전시하는 것도 눈감는지만, 결국 기원화가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시간이 역사 속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대해서라는 논문 주제를 쓰려고 했고 오문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직감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이기 때문에 기원화를 단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뼈조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닭의 속, 염소의 속을 상상하듯이 기원화의 모습에서 여승인 줄 알았던 석정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떤 면에서는 둘 다 시간, 혹은 역사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김교수는 그것은 논증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고, 오문수는 이도 저도 못한 채 허풍을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쪽도 옳다고 생각하기도 틀리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역사 속에서 다뤄지지 않고, 잊힌 곳에서 살아가고 뼈를 묻었을 수많은 사람들, 권력이 있는 자의 편의대로 기원화와 나머지 뼈들의 중요도를 구분지음으로서 결국 그 뼈들은 누구도 그 본질에 다가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기원화가 정말로 하는 말은 무엇일까.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뼈조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상상해 보는 것이 굳이 억지스럽기만 한 걸까. 참 아이러니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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