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남염부주지
‘귀신’에 대한 논의는 예전부터 있어왔다고 한다. 이러한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단순한 판타지나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할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귀신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물음이나 진위 여부에 대한 사실 확인이 아니다. ‘귀신’이 실제로 있건 없건, ‘귀신’에 대한 논의는 따라서 존재해 왔고, 그러한 논의는 그 당시의 세상을 보는 하나의 관점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귀신’에 대한 논의는 ‘삶’과 ‘죽음’에 관련된 생각과 깊이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물음일 것이며,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보는 관점이기도 하다. 당시 사람들이 ‘귀신’을 믿었다면, 그들은 ‘귀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사>를 비롯해 귀신에 대해 쓴 글들을 보면, 귀신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이 존재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귀신은 때로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지만, 결국 ‘사람’이 죽어서 된 것이기 때문에 더 큰 ‘도’나 ‘선인’, ‘하늘’ 등의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 안에는 없애야 한다고 여겨지는 귀신도 있고, 모셔야 한다고 여겨지는 귀신도 있다. 이러한 여러 귀신에 대한 이야기는 <부휴자담론>에 더욱 자세히 나온다. <부휴자담론>은 귀신의 종류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데, 이 안에는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귀신’이 있고 ‘제사를 받들지 말아야 하는 귀신’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귀신’과 ‘받들지 말아야 할 귀신’을 나누는 기준이 단지 인간 세상에 ‘해를 끼치는 귀신인가, 그렇지 않은 귀신인가’가 기준이 아니라, ‘어느 문화의 귀신인가’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천자, 제후, 대부’로 대변되는 ‘제사’와 관련된 귀신들은 중국, 특히 유교권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오랑캐’쪽에서 온 풍습과 관련된 귀신들은 멀리 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귀신’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통해 ‘귀신’에 대한 논의가 단지 그 존재유무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당시 사회적으로 정당화 되던 사상(특히 유교)를 공고히 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에 있어서 설명될 수 있는 ‘귀신’에 대한 논의는 살아남고, 유교적 관점으로 이단이거나, 설명되지 않는 ‘귀신’에 대한 논의는 허황된 것으로 치부되거나 없어져야 할 것으로 여겨지며 금지된다.
이렇게 유교의 이치에 따라서 재해석된 ‘귀신’에 대한 생각은 <남염부주 이야기>에도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염부주 이야기>전반에는 특히 불교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는 이미 주공과 공자를 ‘정도’로 이야기하고, 구담(석가)를 ‘사도’로 이야기하는 데서 알 수 있는데, 이렇게 박생이 ‘남염부주’에 가서 겪은 꿈을 그린 이 이야기는 불교에 대한 비판을 박생과 염마의 입을 통해서 하며 정당화하고자 하는 인상이 강하다. 유학자는 불교적 세계관에 등장한다 할 수 있는 염마에게 예를 갖추어 절할 필요가 없으며, 염마가 유학자인 박생을 예를 갖추어 대하는 것에서도 두 사상의 위계를 읽을 수 있다. 유교의 세계는 이미 마땅히 따라야 하는 ‘도(삼강오륜 등)’가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이단으로 분류된다. 이렇게 ‘일리론’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세계관에서 불도나 무가에서 이야기하는 ‘귀신’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귀신’은 음양의 ‘조화’이자 결국 ‘도’로 통하는 것으로 다시 해석되는데 이는 <귀신의 대하여>에서 김시습이 쓴 귀신에 대한 생각과도 통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화로운 귀신에 대한 생각은 유교에서 권장하는 ‘제사’에 대한 정당화로 이어진다. 제사는 결국 조화를 존경하며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특히 귀신의 조화로움을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를 이용해서 ‘구부러짐’과 ‘폄’ 등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조화로운 귀신’들과 그렇지 않은 요귀들은 철저하게 구분되며 일리론 안에서 불교의 천당, 지옥설과 윤회는 부정된다. 왜냐하면 일리론 안에 이미 하나의 하늘과 땅이 있는데, 그 외에 다시 하늘과 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음양이 조화로운 세계 안에서 죽으면 정신은 결국 흩어지는 것이지, 천당이나 지옥에 가거나 윤회를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 안에서 삼강오륜과 유교적 진리 외의 다른 것은 전부 ‘허황된 것’이다. 이 세계 속에서 유교적 ‘도’에 대한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부자간의 ‘친’, 군신간의 ‘의’ 등이 과연 ‘당연한’ 이치인가?”등의 질문은 무의미하다. 또한 불교의 장례에서 ‘제’를 왜 베푸는지, 지전을 왜 태우는지에 대한 불교 나름대로의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행위는 이미 따라야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는 ‘도’에 어긋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속임수로 치부될 뿐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답하는 이의 세계관을 보여줄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귀신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면, 이 ‘귀신’에 대한 논의 역시도 당시 사회적으로 지배적이던 가치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귀신’에 대한 논의는 때로는 당시 사회적 가치관에 대한 정당화가 되기도 한다. ‘귀신’ 역시 사회의 가치관에 맞게 늘 재해석되고 재배치되며 수정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배적인 가치관이 유교이고, 그 유교에서 정당화 할 수 있는 ‘귀신’이 정해진다면, 그에 따라서 다른 귀신들에 대한 논의는 배제된다. 이렇게 귀신에 대한 논의는 단지 허황된 판타지나 믿음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는지를 이해하는 도구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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