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동어미화전가, 수심도 한숨도 꽃 화자로 부쳐버리고

덴동어미화전가

화전가는 규방가사의 하나이다. 화전가는 주로 여성들이 춘삼월 호시절을 당하여 신명나게 놀아보자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여성들의 놀이 욕망, 풍류와 흥이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문학 장르라 할 수 있다. 화전가는 당일 몸치장을 하는 모습부터, 화전을 만들며 노는 장면, 그리고 아쉬워하면서 집에 가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덴동어미화전가>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전가에는 이러한 풍류와 흥의 정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서사->신변탄식->봄날의 찬미->놀이 공론->택일->통문->시부모의 승낙->준비->치장->승지 찬미->화전->회식->여흥->파연 감회->이별과 재회의 기약->귀가->결사로 흔히 정리되는 화전가의 구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화전가에는신변탄식의 부분이 들어가며, 구조상 보통 풍류를 서술하기에 앞서서 이야기 된다. 화전놀이를 하는 날은 여성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즐거운 날이면서도 또한 회한이 교차하는 하루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회한’, ‘신변탄식속에는 자신의 인생이나 운명에 대한 시각이 녹아있다.

<덴동어미 화전가>에도 늙은 부녀, 젊은 부녀, 늙은 과부, 젊은 과부가 한데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는 모습이 그려진다. 화전놀이는 여성들이 자신의 놀이 욕망에 적극적이 되는 계기이면서 동시에 다른 여성들과 소통하는 소통의 장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덴동어미 화전가>에서도 먼저 청춘과녀가 자신이 청상과부가 된 기구한 사정, 외로움을 먼저 노래한다. 신부녀들이 꽃단장을 하고 나온 것과 대비되어 단장하는 의미를 상실한 청춘과녀는 외모부터 꾀죄죄한 모습이다. 청상과부의 한탄을 들은 덴동어미는 청상과부를 달래며, 자신의 기구했던 인생담을 들려준다. 덴동어미가 마찬가지로 청상과부가 된 이후에 3번의 개가와 상으로 결국 불구가 된 아이와 자신만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결국 청상과부가 된 것도 팔자고 운명이며, 바꾸려고 발버둥 쳐 봐야 팔자는 고칠 수 없으며, 개가 하면 더 고생할 확률이 높으니 수절을 하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팔자는 어쩔 수 없다고 마음을 비우면, 마음이 편안하다는 달관한 태도를 보인다. 청상과부는 덴동어미의 말에 동의하며, 화전놀이를 통해서 다 함께 수심을 푸는 것을 볼 수 있다. 화전을 하나씩 부치며 수심도, 흔들리는 청춘의 마음도, 한숨도, 근심도 함께 부쳐버리고, 설움은 화전놀이의 즐거움과 웃음으로 사라진다. 쌓인 눈이 녹듯이, 마음속의 회한도 화전놀이에서의 소통을 통해 즐거움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너무나 짧은 하루가 끝나며 화전놀이를 마쳐야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덴동어미화전가>는 마무리된다.

덴동어미의 삶의 경험은 기구하다고 할 수 있다. ‘덴동어미덴동이의 어미라는 이야기인데, ‘덴동이는 화상으로 데인아이라는 의미로 불에 손과 발이 없어진 아기이다. 이러한 덴동이를 늙은 몸으로 키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덴동어미가 쳐해 있는 상황이 녹록하지만은 않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덴동어미가 들려주는 삶의 서사는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처럼 겹치는 불행만을 만난 여자주인공이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떠오를 만큼, 불운으로 치달은 삶이다. 덴동어미의 일생은 기대와 좌절이 반복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덴동어미는 끊임없는 좌절을 겪는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질까 하고 개가를 하거나, 일을 하거나 하지만 결국 그 잘 살고자 하는 꿈은 계속되는 좌절을 겪는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듭되는 좌절 속에서도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해 왔던 덴동어미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눈에 띄는 말로 흥진비래가 고진감래가 될까 라는 말이 거듭 되풀이 되는 것이 보인다. 두 사자성어는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흥진비래와 같이 지금까지 삶이 힘들었으니, 고진감래로 그만큼 앞으로 밝은 미래가 있기를 바라는 덴동어미의 소망이 들어간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덴동어미의 그러한 희망은 늘 더 큰 불행 앞에서 스러진다. 그러한 상황 때마다 죽을 듯하나 생목숨 죽기가 어려워라는 말처럼 차마 죽지 못하고 근근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추천, 괴질, , 불에 의한 4번의 불행을 겪은 후 덴동어미가 깨달은 것은 팔자는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잘 살아보자고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되니, 자기 팔자를 받아들이고 살아야겠다는 체념이며, 한편의 달관이다. 어차피 미래는 모르는 것이고 팔자는 모르는 것이니 좋은 일도 그뿐, 안 좋은 일도 그뿐이니 좋은 지금(화전놀이) 이때에는 신나게 놀아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만물이 슬퍼 보이고 안 좋아 보인다면 그건 결국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태평한 마음을 가지면 힘들 일은 별로 없다고 이야기한다.

덴동어미가 마지막에 가지게 된 태도에는 삶에 대한 한 점 후회나, 혹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이나 팔자에 대한 한탄은 더 이상 없다. 어떻게 살든, 어떤 삶의 형태이든 고생은 따라오게 되어 있고, 힘들게 되어 있고, 그러한 자신의 고생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삶도 저마다 한이 있으며 힘든 사람이 일찍 죽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더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덴동어미의 사고가 사회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로운 태도만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덴동어미가 재가를 거듭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고독에 대항한 여성의 욕망에 충실한 행동이었다고만 할 수 있는가?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스스로 경제력을 가지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은가? 덴동어미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된 다른 재가한 청상과부들의 예까지 들어가며 청춘과녀에게 개가를 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정조 이데올로기가 남아 있던 시대에서 여성이 한번 개가를 하게 되면, 주위의 부정적인 시선을 피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그 재가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받게 되는 고통은 더욱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재가가 실패하면, 다시 혼자서 뻔뻔하게 친정집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덴동어미가 계속되는 재가를 한 이유는 어쩌면 여성 혼자 살기 힘든 사회 현실과 더불어서, 정조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미 한번 재가한 덴동어미는 다시 결혼을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살 길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같은 고생을 하더라도 수절 고생하는 사람 귀히 보고, 개가 고생하는 사람 그르게 보는세상에서 이왕이면 덜 고생하라는 것이 덴동어미의 말이다. 개가하면 그 자체로 그른 사람이 되고 정절을 지키면 그 자체로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 당시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개가를 거듭할수록 이후에 덴동어미의 삶은 갈수록 더 힘들어진다. 나이가 들고, 개가를 할수록 더 좋은 곳으로 개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개가에서부터 닥친 경제적인 불안정함, 고통은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다시 닥쳐온다. 하인 일을 해서 돈을 모으려고 하면 괴질이 닥치고, 세 번째 개가에서 돈을 모으려고 하면 병이 나더니 결국 물난리까지 나고, 네 번째 개가에서 엿장사를 하면서 어떻게 살까 했더니 화재가 난다. 할 수 있는 일이나 가능성은 개가를 거듭할수록 적어지며 삶은 더욱 궁핍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럴 바에야 수절해서 욕이라도 덜 먹고 살자는 덴동어미의 말도 어쩔 수 없이 일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덴동어미가 겪은 고생은 이러한 사회적 틀과 정절 이데올로기로 인해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전놀이는 여성들의 소통의 장으로 서로 한을 풀고, 달래며 한을 놀이로 승화시키는 하나의 놀이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덴동어미는 청춘과녀에게 달관적인 태도를 보이며, 함께 시름을 화전과 함께 부쳐버린다. 그러나 덴동어미의 기구한 삶 뒤에는 개가한 여성의 불행한 운명을 생산하는 사회가 그 뒤에 있었음 역시 주목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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