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하생기우전, 김시습 - 믿음으로서 지속되는 환상, 현실과 환상의 경계

김시습,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하생기우전 

<만복사저포기><하생기우전>은 죽은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귀신과의 사랑이야기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환상성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이야기에서는 공통적으로 이미 죽은 여인이 주인공 남자들을 만나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무덤과 순장품이 나오고, 이러한 소재를 바탕으로 죽은 여인의 가족들과 주인공 남성이 만난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두 이야기는 결말에서 차이가 난다. <만복사저포기>의 여인은 양생과의 잠깐의 인연을 끝으로, 이승과 저승을 뛰어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 환생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환상성이 죽음이라는 현실의 벽, 경계를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하생기우전>의 여인은 하생과의 인연을 계기로 다시 살아난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더 극단적인 환상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환상성은 믿음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적어도 주인공에게는 환상적 체험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을 수 있는 일이자 사실이 되는 것이다. 두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이끌어나가는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주인공들이 지닌 성격이다. 하생과 양생은 의심 없는 성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생은 처음부터 신빙성이 그다지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점쟁이의 말을 믿고 여인을 찾으러 간다. 그리고 깊은 산 속에서 여인과 시종들만 살고 있는 집을 발견하는데, 깊은 산 속에서 여인이 혼자 살고 있는 데 대해서 기이하게 생각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또한 여인이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고백했을 때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자신이 하룻밤 인연을 맺은 사람이 알고 보니 귀신이었더라.’라는 소재는 공포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하생은 자신의 체험이 가질 수 있는 기이함이나 공포감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양생은 하생보다 더욱 더 담담하게 그려진다. 하생과 양생의 결적적인 차이점은 하생은 귀신인 여인과 인간세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둘만의 공간에서만 보았다면, 양생은 인간세상에서도 함께 있었다는 점이다. <하생기우전>의 귀신은 인간 세상에 그대로 내려오지는 않는다. 죽어있는 동안 여인은 잠 들어있는 것 같은 상태와 비슷한 상태로 묘사된다. 반면 <만복사저포기>의 여인은 다르다. 귀신의 몸으로 자신의 가족들이 있는 자리에 양생과 함께 간다. 양생은 자신이 보고 있는 여인을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기이한 체험을 한다. 그러나 양생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여인이 귀신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귀신을 귀신으로 보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양생 자신이다. 사실 여인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기이함’, ‘어딘지 이상한, 현실이 아닌듯한 느낌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여인은 저도 역시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힘주어 나도 사람이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잘 없다. 이 대목은 여인이 충분히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섬뜩한 장면인 것이다. 그러나 양생은 이러한 대답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물론 의심의 순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언뜻 언뜻, 여인이나 여인과 관련된 것들이 인간세상의 그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순간들이 양생에게도 찾아온다. 그러나 양생은 그런 느낌을 깊이 추궁하지 않는다. 이상한 느낌들을 자기 나름대로 합리화 시키면서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여인과 관계, 환상성은 그렇기 때문에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하생기우전>은 크게 보면 환상성을 사용한 소원 성취담으로 읽을 수 있다. 배필을 원했던 남성이 죽은 여인과의 인연을 통해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기이한 환상성은 소망을 이루어주는 다리로 작용한다. 이러한 환상성은 현실에서의 가장 큰,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경계조차도 가볍게 초월한다. 그에 비하면 <만복사저포기>는 더욱 현실에 중심축을 두고 있다. 귀신 여인은 오로지 양생에게만 보이며, 양생을 제외한 그 누구도 여인을 보지 못한다. 양생이 겪은 환상은 환상일 뿐,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지는 못한다. ‘저승길은 마땅히 가야 한다는 말처럼 죽은 여인은 죽은 여인이고,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으로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양생은 그 경계에 잠시 들렀던 인물일 따름이다. <하생기우전>이 몽상 속의 꿈같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만복사저포기>는 환상을 통해 냉정한 현실을 다시금 환기시키고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삶과 죽음의 넘을 수 없는 경계, 환상으로는 해소 되지 않는 현실의 냉정함이다. 여인이 살아남으로서 <하생기우전>의 환상적 체험은 하생 한명에게 머물지 않고 가족과 세계 전체까지 환상적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끝끝내 여인을 홀로 떠나보낸 양생의 환상적 체험은 여인의 부모는 인정하지만, 혼자만의 체험으로 끝나고 만다. 양생의 체험은 다른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못할 수 있는 고립되고 은밀한 경험인 것이다. 환상을 통해 마주할 수 있는 것은 꿈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냉정한 현실이다. 이렇게 환상과의 경계가 홀로 허물어진 양생은 더 이상 사회에서 관계를 이루며 살지 못한다. 이미 환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 되어있는 사회에서 양생의 경험은 경계 밖에 놓이기 때문이다.

환상성은 소설 속에서 이렇게 때로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은밀한 소망을 달성해주는 달콤한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상기시켜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환상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현실이며, 환상은 현실의 냉혹함, 겉으로 발현되지 못하고 좌절되는 욕망의 다른 모습이자 또 다른 그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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