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홍련전
장화홍련전은 전형적인, 계모가 전처의 자식들을 박해하는 이야기이다. 계모인 ‘흉녀 허씨’라는 여인은 생김생김부터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행실은 그 용모에 걸맞게 더욱 간악한 인물이다. 그러나 흉녀의 악행, 그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불쌍한 두 자매, 그리고 그 두 자매의 원을 풀어준 부사의 이야기만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것인가? 사건의 모든 원흉은 흉녀에게만 있는가?
흉녀 허씨에게로 모든 비판의 화살을 돌리기 전에, 당시 사회에 퍼져 있었던 남아선호와 부성의 부재로 장화홍련전은 다시 읽을 수 있다. 물론 흉녀라는 인물이 고전 소설에서 그려지는 전형적인 ‘악’에 속하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흉녀’를 집안에 불러들인 인물은 누구인가? ‘흉녀’를 불러들이게 된 계기는 또 무엇인가? 장화와 홍련의 친 어머니인 장씨는 두 자매가 어린 시절에 숨을 거둔다. 그리고 이 때 장씨가 하는 ‘유언’은 놀랍게도 이미 배 좌수가 ‘후처’를 취하게 되리라는 것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후처’는 어린 장화와 홍련을 기르고 돌보아 줄 사람에의 바람인가? 배 좌수가 두 딸에게서 마음이 떠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아닌 듯싶다. ‘후처’는 다만 ‘후사’를 위함이다. 장화와 홍련이 아무리 빼어나고 아무리 출중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 두 자매의 존재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고, 친 어머니인 장씨조차도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악한 계모인 흉녀를 불러들인 것은 다름 아닌 배 좌수 자신이며, 이를 이미 예견한 것은 친 어머니인 장씨이다. 장씨는 자신의 딸들의 행복 보다는 배 좌수의 ‘후사’를, 그 ‘후사’를 자신이 만들어 주지 못했음을 한편으로는 더 생각한 것은 아닌가? 장화와 홍련 중에서 한명이라도 ‘남아’였다면, 장씨의 유언은 어떻게 바뀌었을 것인가? 두 부부의 남아 선호는 두 딸의 출생 때부터 드러난다. 두 딸의 출생에 대한 두 부부의 반응은 사뭇 대조적이다. 오랜 세월 자식이 없던 차에 기이한 꿈과 함께 태어난 첫째 딸 장화의 탄생에는 기뻐하던 부부가, 둘째 홍련 역시 딸임이 밝혀지자, 처음부터 ‘아들’ 낳기를 소망하던 부부는 기뻐하기 보다는 서운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자매는 출중했으나, 그러한 숙성함은 오히려 염려의 대상이다. 허씨는 이미 용모와 품행으로부터 좋은 계모는 될 수 없는 인물임이 암시된다. 좌수 역시 허씨가 마음에 든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게’ 후사를 위해 허씨와 재혼한다. 마음에 안 드는 인물과, 두 딸을 박해할 것이 암시되는 인물과 결혼해야 할 정도로 ‘후사’는 중요한 문제인가. ‘아들’은 중요한 문제였을까.
더 놀라운 것은 장씨가 죽으며 ‘장화 형제를 기를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는 것이다. 장씨가 죽더라도, 장화와 홍련에게는 친 아버지가 남는다. 친 어머니라는 ‘모성’의 부재는 딸들의 불행을 운명 짓는가? 친 아버지는 양육자의 가능성에서 ‘처음부터’ 배제되고 있는 것인가? 변 좌수는 두 딸을 측은하게 여기지만 그 두 딸이 ‘불쌍해 진’ 원인 중에 하나가 계모 흉녀를 불러들인 자신에게 있음을 인지하지는 못한다. 혼자서 두 딸을 ‘부성’으로 길러, 잘 키울 가능성은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다. 심지어는 계모의 간계에 속아 딸이 임신한 사실을 믿고, ‘양반’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앞세워 친 딸을 살해하는데 동의한다. ‘양반’으로서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딸을 향한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었는가. 변 좌수에게는 ‘부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자식을 죽이는데 ‘공모’한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변 변좌수의 행위는 살해당한 당사자인 ‘딸’에게 조차도 용서받는다. 이 서사 속에서 변 좌수의 잘못은 다만 계모의 꾐에 속아 넘어간 ‘어리석음’일 뿐이며, 흉녀라는 원흉을 처음부터 집안에 불러들인 것이나, ‘양반’으로서 낙태한 것으로 보이는 친 딸을 죽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의 사고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친 자식을 가장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부성은 부재하며, ‘후사’나 ‘가문’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사의 진행에서 제외된 또 한 가지는, 바로 흉녀의 세 아들 중 장쇠 외의 두 형제의 행방이다. 장쇠는 장화를 살해한 장본인으로 교살 형에 처해진다. 그러면 남은 흉녀의 두 아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장쇠와 함께 벌을 받은 것인가? 그러한 묘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면 두 아들은 흉녀와 장쇠의 처벌 이후에도 변좌수와 함께 살아간 것인가? 그렇다면 변좌수는 집에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공양할 사람을 찾아 어린 윤씨에게 다시 한 번 장가를 들었는가? 아들들은 그에게 공양하지 못했는가, 혹은 공양할 의무가 처음부터 아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인가? 만약 두 아들이 장쇠나 흉녀와 함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다면, 윤씨 역시 두 아들에게는 ‘계모’가 된다. 그러나 같은 ‘계모’라고 할지라도 두 아들과 윤씨의 갈등은 서사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윤씨가 품성이 착한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전처의 자식들이 ‘아들’이기 때문인가? 윤씨가 딸만을 낳고도 허씨와 다르게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딸들이 장화, 홍련의 화생이어서 가 아니라 더 이상 ‘후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도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얼핏 계모의 악행과 그에 대한 징벌과 원한을 푸는 이야기로만 보이는 이 서사 속에는 이렇게 은연중에 남아선호에 대한 긍정, 부성의 부재의 당연함, 양반의 체면의 중시라는 당대 사회상의 합리화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장화, 홍련의 시련의 근원은 흉녀 ‘허씨’에 의해서 교묘히 감추어져 있는 이 사회상 자체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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