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향수 소설, 향수 영화, 파트리크 쥐스킨트
- 책, 독서, 서평
- 2022. 8. 10.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향수 소설
그루누이라는 인물에게는 인간적인 고통이나 고뇌 등이 처음부터 빠져있다. 그루누이는 다른 모든 잣대 없이 오로지 <냄새>라는 하나의 잣대만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한다. 어떤 면에서 후각에 의존한 판단은 은밀한 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고, 눈속임을 없애고 모든 사물을 ‘냄새’만큼은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는 면에서 공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쩌면 ‘사랑’, ‘윤리’, ‘법’ 등 사람들 사이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는 요소들에는 그러한 ‘냄새’가 없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그루누이에게 처 음 부터 이러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있다. 모든 판단이 유보된 채, 그루누이의 행동과 사건 자체를 중점으로 서술하고 있는 이 소설은, 그만큼 속도감 있고 쉽게 읽힌다.
무엇보다도 ‘냄새’라는 영역을 집중적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흥미롭다. 인간의 오감 중에서 가장 무딘 영역이라는 ‘냄새’라는 영역에 주목함으로서, ‘새로운 세상’을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다른 감각을 배제한 채 초월적인, 초인적인 ‘후각’에 의존한 세상은 한편으로 지금까지 인식했던 세상에 비해 엄청나게 풍부하다. 우리의 시각이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열고 상상하게끔 해주기 때문이다. 후각이 인간보다 예민한 짐승들이 느끼는 세상은 이러한 걸까, 하는 생각이 소설을 읽는 중간에 가끔 들었다. (예를 들어 보지 않고도 건너방에 사람 두명이 있다는 것을 냄새로 안다거나)
그리고 이 소설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후각’의 영역을 ‘감정’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감정을 느끼는 원인’이 ‘냄새’에 있다고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인지는 별도로 치더라도, 이로 인해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후각’의 영역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그루누이의 갈등은 ‘숙명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부터 스스로는 냄새가 없이 태어났으며, 천부적인 ‘후각’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루누이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잔혹한 살인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살인자’의 잣대를 대기에는 조금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그는 살인이 ‘잔인한 행동’이라는 의식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심리 자체를 근원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루누이가 바라보는 세계는 <후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계와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루누이의 초후각은, 그루누이가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인 동시에, 그들의 세계에 결코 끼어들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에게 삶의 의미로서 남은 숙명은 오직 ‘향기의 세계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목적을 이룬 이후에도 그 업적을 이해하는 자는 아무도 없기에 한편으로는 그 의미를 잃는다. 그가 만든 ‘향수’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을 그루누이 자신은 이해하기 힘들고, 반대로 사람들 역시 그루누이의 ‘향수’의 훌륭함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냄새’로 만들어진 자신만의 완벽한 세계 안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그루누이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냄새’의 세계에 ‘자신의 냄새’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사람들의 영역 속에도, 자신이 바라보는 냄새의 영역에도 속하지 못하는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소설을 읽을수록 ‘살인자’인 그루누이에게 연민의 감정이 함께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살인자에게 느끼는 연민과 동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루누이는 세상과 유리된 고독한 천재인가. 아니면 자신의 세계 속에 빠져든 광기어린 살인자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의문점 중 하나는 왜 ‘가장 아름다운 냄새’를 소녀에서 성인으로 가는 단계에 있는, 처녀성을 여성의 냄새로 설정했을까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여성들은 또 왜 모두 ‘아름다운 외모’로 표현될까 하는 점도 의문이었다. ‘냄새’를 통해 바라보아도, 결국 눈에 보이기에 예쁜 것이 냄새도 좋은 것이라는 것일까? 아니면 좋은 냄새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눈에 아름답게 비친다는 것일까?
향수 영화
<향수>의 영화화가 힘들었을 것 같은 이유는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영역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국 그것을 음향이나 시각적인 요소로 바꾸어서 표현해야 하는데, 역시 소설의 묘사를 읽고 상상하는 것과 카메라 앵글의 제한된 화면을 통해 바라보는 것과는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소설을 영화화 했을 때, ‘원작에 얼마나 충실 했는가’가 꼭 영화의 훌륭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원작을 먼저 읽은 독자들의 경우라면 자연히 영화에서 원작의 느낌을 기대하기 마련이고, 원작과 많이 다를 경우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꼈던 괴리감은 그루누이가 잘생겼다는데서 오는 괴리감이었다. 게다가 그루누이의 마음 깊은 곳에 깔려 있는 인간에 대한 경멸 역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오히려 눈물을 흘리는, 인간적인 면이 부각된 인물은 소설의 그와 꽤 다르게 느껴졌다. 그루누이의 생각을 서술을 통해서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그루누이의 행동이나 표정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생각을 읽어야 하는데, 좀 막연한 부분이 있었다. 소설의 내용을 생각하며 그의 행동의 원인을 끼워 맞추어야 했다.
그리고 첫 번째 살인에서 여성의 얼굴을 보여준 것도 달갑지는 않다. 여성이 돌아보는 순간 놀라는 그루누이의 모습에서, 그가 여성의 오직 향기에 반했다기 보다 외모에도 반한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여성의 모습을 계속 반복해서 떠올리는 것으로 더욱 그랬다. ‘무형’의 향기를 무엇으로 표현해야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물 자체를 보여주면서 향기를 상상하게 하는 데는 역시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은가 싶다. 아니, 향기를 떠올리면 모습이 함께 떠오르고, 모습만 봐도 향기를 떠올릴 수 있다는 그루누의의 능력 상 사실 형태도 향기와 떨어지지는 않는 것일까?
‘악취’가 아닌 ‘좋은 향기’를 표현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낀다. 여성의 몸을 샅샅이 들이킬 때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건 ‘좋은 향기’가 아니라 ‘시체냄새가 나지는 않을까?’였으니까.
방대한 분량의 책에서, 어떤 부분을 어떻게 추려서 효과적으로 보여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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