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사나이, 호프만, 독일 문학, 독문학
- 책, 독서, 서평
- 2022. 8. 9.
E.T.A 호프만, 모래사나이
신기하게도 보면 볼수록 인상이 달라지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사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쪽 이야기를 쓰려면 다른 줄기의 이야기가 걸리고,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서 맥락이 없어지고 있다. 그런 것들을 비록 글로 잘 정리는 못하겠지만, 정말 이 짧은 소설은 오만가지 잡생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풍부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읽으면서 ‘인형을 사랑하는 남성’ 모티프와 코펠리우스라는 이름을 어디선 가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생각해보니 발레 <코펠리아>였다. <코펠리아>가 호프만의 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모래 사나이>를 가장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만드는 인물은 코펠리우스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 아저씨의 정체는 수수께끼이다. 물론 그는 연금술을 연구하는 사람이며, 인형제작자로 어린 시절 나탈나엘의 관절을 조사해 본 것도 인형만들기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하면 그의 행동의 수수께끼 중 많은 부분이 풀린다. 그러나 그는 마치 정말 마술적인 존재로 나타나엘의 모든 심리를 꿰뚫어보는 것 같다. 특히 “하하, 그냥 기다려요. 곧 스스로 내려올 거요.”라는 마지막 그의 대사는 나타나엘의 미래를 읽고 있는 듯 하여 섬찟하다. 홀연히 사라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확하게 나타나는 그는, 나타나엘에게는 충분히 ‘모래사나이’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이 소설에서 크게 대립하는 두 요소는 클라라의 산문적인 정서와 나타나엘의 신비주의적인 정서이다. 달리 말하면 일상과 환상으로 볼 수도 있다. 나타나엘의 신비주의는 유년 시절의 기억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모래 사나이’이야기와 현실의 ‘코펠리우스’로 인해 겪었던 경험이 버무려져 생성된 일련의 ‘눈’에 대한 공포감은 코펠리우스와의 재회를 통해 극대화된다. 나타나엘의 안에서 코펠리우스로 형상화 된 모래사나이는 눈을 뽑는자, 눈을 모으는 자이다.
클라라는 그의 그러한 공포가 그의 내면에서 생겨난 것일 뿐이라고 냉정하게 이야기한다.
코펠리우스는 연금술사였고, 그가 생각하는 ‘모래사나이’로서의 코펠리우스의 이미지는 단지 나타나엘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고 주지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사라져 버릴 환영이라고.
그러나 클라라의 말은 나타나엘에게는 ‘자신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느껴질 뿐이다. 클라라의 설명은 나타나엘에게 있어서 절대로 명쾌하지도, 충분하지도 않은 것이다. 나타나엘이 느꼈던 공포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이전의 심연에 있는 것으로, 언제든 불쑥 눈을 가지러 올 코펠리우스의 환영은 자신 안에서 쉽게 지워지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리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로 설명한다 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공포감이다.
그 이성적으로 설명되어지기 이전의 그 어떤 것,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러나 매우 섬뜩하고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때는 분명 존재한다. 사실 그래서 나에게 ‘나타나엘’의 감정은 비현실적이어서 이해하기 힘든 미치광이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말로 설명되기 전’의 어떤 것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이해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문자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다. 편지가 끝나고 등장하는 ‘작가’의 이야기에서, 작가도 결국 같은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할 ‘기이함’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할까 고민하던 작가는 결국 서술하기를 포기했다고 말한다. 이야기의 시작을 대신 하고 있는 것은 나타나엘의 생생하고 기이한 유년의 기억이 들어 있는 편지이다.
광기가 찾아온 이후의, 언뜻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의 대사와 행동들은, 전혀 맥락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타나엘은 코펠리우스가 결정적인 순간에 눈을 앗아감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파괴해버리고 말리라는, 떨쳐버릴 수 없는 예감을 담은 시를 쓴다. 그리고 그가 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그의 시가 그에게 ‘환상’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가 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가슴에는 클라라의 눈을 대신한 올림피아의 눈이 던져졌고, 그 순간 그는 스스로 적었던 시에 등장했던, 피투성이가 된 안구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이글거리는 붉은 동그라미’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불의 동그라미여 돌아라!”라면서. 그리고 언뜻 괜찮아 보였던 나타나엘의 두 번째 발짝에서 그는 동그라미를 외치다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래! 아름다운 눈이야, 아름다운 눈이야”라고 외치면서 난간 너머로 몸을 던진다. 그가 외친 ‘눈’은 그의 시 속에서 불의 동그라미가 그렸던 불길이 사그라들고 나타났던 클라라의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클라라의 눈을 통해 그를 바라보고 있던 것은 ‘죽음’이었다. 그는 바로 그 ‘죽음의 눈’을 보고 외치면서 동시에 죽음으로 뛰어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나타나엘은 어떻게 ‘인형’인 올림피아를 사랑했을까? 라는 질문의 대답은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눈에 띄었던 것은, 나타나엘 역시 찰나의 순간동안 그녀의 차갑고 기계적인 속성을 인식했다가도 이내 그 의심을 덮어버린다는 것이었다. 마치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이 귀신인 처녀를 언뜻 언뜻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이내 넘어가 버리듯이. 인형을 끊임없이 살아있는 생명으로 인식하여 그녀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다름 아닌 나타나엘 자신으로 보였다. 올림피아의 유리구슬 같은 인공 눈을 나타나엘이 응시하면 응시할수록, 나타나엘은 그 눈 속에서 점점 타오르는 생기를 발견한다. 나타나엘의 뜨거운 열망과 눈동자가 인형 눈에 투사되어 그대로 드러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미 너무나 아름다운 여성으로 인식된 올림피아는 그 후에 다가오는 의심스러운 구석을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나타나엘에게는 당연한 생명체였다. 그리고 반대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클라라에게는 ‘자동 기계인형 같다’는 독설을 퍼붓는다. 인형과 인간의 경계가 인식에 의해서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이런 것은 확실히 환상이다. 사실이 아니다.”라고 못 박을 수 있는 클라라는 어떤 의미에서 축복받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나타나엘 처럼 이성적인 설명으로 만족되지 않는 공포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형 사건의 후일담이다. 사건 이후 아무리 명망있는 교수나 법률가 예술 애호가 등이 인형과 인간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상대방에 대한 의심을 쉽게 지우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은 사람들이 ‘자신이 인형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실수를 하거나 하품을 자주 하는 등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연출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나타나엘에게 찾아왔던 극단적인 공포와 그것이 만들어낸 환상은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미 그의 생각은 단지 ‘환상’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코펠리우스가 어떤 인물이었건 간에, 나타나엘이 그를 ‘모래 사나이’로 ‘지각’하고 있었다면 나타나엘에게만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삶 자체가 기이하지 않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가 인식하고 있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타인의 감정을 가늠하고, 사물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면서. 결국 내가 무엇을 ‘이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어떤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럼 그 외에 존재할 수 있는 수많은 관점들을 생각할 때 나는 환상이 가지고 있을 지 모를 한줄기의 진실성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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