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카렌 두베, 독문학, 독일 문학
- 책, 독서, 서평
- 2022. 8. 7.
카렌 두베, 폭우
폭우,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겹게 내리는 비는 집을 조금씩 좀먹어 간다. 탈수제를 뿌리고, 도랑을 파고, 필사적으로 물로 인한 피해를 막아보려고 애쓰지만 물은 조금씩 조금씩 집을 잠식해 가고 급기야 무너트린다. 이 집의 모습은 어딘지 레온과 마르티나의 모습과 닮아 있다. 자신에게 처해진 삶에서 버둥거리지만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는, 혹은 버둥거릴수록 스스로를 옥좨는 그들의 삶과 말이다.
소설 전반을 덮고 있는 지릿한 비. 생명과 죽음의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물은 이 소설에서는 끊임없이 퀴퀴한 냄새와 함께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장 처음 ‘물’과 관련되어서 등장하는 것이 ‘익사체’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생명체’의 흔적을 느낄 수 없는 퉁퉁 불은 살덩어리. 그것은 건강한 삶을 상실한 마르티나와 레온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늪, 그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면서 점점 가라앉아 가는 그들의 모습을 굳이 남성/여성의 잣대로 나누어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성학 과제를 하고 난 다음에 읽어서인지, 이 소설은 끊임없이 이쪽 방향으로도 읽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은 모두 ‘남성성’을 가지거나 동경하는 남성우월주의자(소위 마초라 불리는)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주유소에 있던 놈 까지도 여성을 대상화한다. 하리와 피츠너가 전형적인 ‘남성의 세계’를 구축해 그들의 권위 속에서 사는 존재들이라면, 레온은 ‘남성성’을 상실한 ‘거세된’ 남성일 것이다. 그는 친한 친구에게 유린당하는 자신의 아내조차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남성이다. 그렇다고 레온이 마초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닌데,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없는 남성성을 동경하고 추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추구가 꺾인 다음에는 급기야 “난 남자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살아가며 끊임없이 망가지는 몸, 끊임없이 확인되는 그 자신의 무력감. 언제부터인가 레온은 이미 스스로 물러터진 시체였던 것은 아닐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체를 마냥 바라보고 있었던 것도, 죽음과 위험의 냄새가 깊게 도사리고 있는 늪지대를 보면서 안정을 얻은 것도, 어쩌면 마음 저편 한 구석에서 느꼈기 때문인 것일까? 자신이 쉴 수 있는 곳은 저곳뿐이라는 것을.
한편에서 여성 작가가, 이토록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남성 캐릭터들을 그려냈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들에게 여성은 짐짝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이 소설에 레온만 등장했다면 어쩌면 이 소설은 ‘강함으로 질서 메겨진 남성들의 세계’와 그 속에서 도태된 남성인 레온의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마르티나’가 다른 이야기를 만들며 존재한다. 이들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모두는 자신의 영역에서 ‘제외된 자’라는 점에서 이란성 쌍둥이와 같은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레온이 그러한 ‘남성성’의 희생자라면 어쩌면 마르티나는 ‘여성성’의 희생자인 듯 했다. 그녀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것은 다름 아닌 ‘성’이다. ‘여성다운’ 조신함을 지키지 못하고 펠라치오의 현장을 들킨 그녀는, 아버지의 세계에서 제외되었다. 대문 앞에 서있는 그녀의 죄를 끝까지 알리며 천천히 녹슬어 가는 자동차는 그녀의 분신이다. 그 자동차와 같이 그녀는 살아도 산 게 아닌 듯 천천히 녹슬어 간다. 그녀를 압박하는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하나의 방편은 폭식과 구토이다. <아버지 저는 속죄했어요.>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끊임없이 게워내며 스스로를 벌한다. 구토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나 벅차다. 마르티나는 한편으로는 남성들이 ‘아름답게’ 여기는 그 시대의 ‘여성다움’에 자신을 맞춰간다. 구토는 한편으로는 남성들이 원하는 ‘마른 체형’을 꾸역꾸역 먹어도 유지 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철저히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다. 권력 관계에서 그녀는 레온보다도 아래에 있다. 그 남편이 무능했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시련이었다. 그럼에도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자신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하고 생각하는 것이 도한 그녀인 것이다. 그렇게 그 시대의 ‘여성다움’에 충실한, 누가 봐도 아름답고 마른 그녀는, 끊임없이 남성들에 의해 대상화 되고 급기야 먹이가 된다. 마르티나는 카이와 이사도라와의 만남을 통해서, 조금씩 변화 되는 듯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동차가 서 있는 한,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죄책감과 어둠이 사라지지 않는 한, 표면적인 발버둥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또 한편으로 이사도라와 카이는 그 시대의 ‘여성성’의 반대급부를 달리는 인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는 통념에 반하는 ‘남자 같은’ 모습과 성격으로, 이사도라는 ‘과장된 여성성’으로. 특히 자연스럽게 나체로 다니고 남성을 안는 이사도라의 모습에서 모계중심사회의 풍요의 신을 보는 듯 했다. 그런 이사도라와 카이가 마르티나를 위한 복수로서, 피츠너와 하리를 살해하는 것은 ‘남성성’에 대한 단죄였을까.
침묵 속에서 그들을 태우는,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처리하는(?) 그녀들을 보면서 네덜란드 영화인 <침묵에 대한 의문>에서 여성들이 한 남성을 살해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 여성들은 옷가게에서 한 남성을 침묵 속에서 잔혹하게 죽인다) 그들의 행위가 남성을 향한 철저한 분노의 표출로 읽힌 것이다. 그리고 우스운 것은, 이 행위가 피츠너와 하리를 누구보다도 죽이고 싶었을 레온의 태도를 바꾼다는 데 있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지독하다.>라고 되뇌는 그는, 결국 권력 관계에서 하리와 피츠너의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세된 남성이었지만, 그럼에도 ‘여성’보다는 우위이고 싶은 ‘남성’이었던 것일까. 사실 피츠너와 하리 그들 모두에게 위협을 불러왔던 ‘공통된 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 상황에서 다시 피츠너와 하리의 편에 서는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극단적이고, 일그러져 있다. 세계는 그렇게 ‘일그러진’ 존재들이 모여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인간성이 민달팽이가 짓눌리는 것 마냥 뭉개지는 일이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듯이.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다. 그들은 끝없는 고독감 속에 모두 홀로 서 있다. 그들은 다만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일그러진 채 성 도착과 시체에 관심 등의 기형적인 모습으로 그들의 닿지 않은 마음을 표출한다. 그런 삶 속에서 해방구는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선택지로 밖에 열려 있지 못했던 걸까?
이러한 섬뜩함은 소설 전반을 흐른다. 그것은 괴기스러운 공포에 의한 섬뜩함이 아니라, 피부로 다가오는, 인간성을 철저하게 뭉개고 짓밟는, 구질구질한 삶 자체에 대한 구역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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