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화력 괴테, 인간에 대한 탐구

괴테, 친화력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정말 즐거움을 주었던 부분은 27장의 오틸리에 편지이다. 공대를 박차고 나와 인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인문대로 옮겨온 내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으로도 이 소설이 나에게 준 기쁨은 컸다고 할 수 있다. (너무 국지적이지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차피 책이라는 것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어야 또 즐겁게 읽기 마련이 아닐까?) 자연과학에 태한 탐구는 그 자체로 존경받을만하고 멋지지만,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채 멀리서 진행되었을 때 그것은 또 얼마나 낯설 수 있을지. 정말 내 더욱 마음을 울리는 것은, 생물들의 형태를 조목조목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한편의 시 일수 있다. 물론 이 일기에 써 있듯이 자신이 하고 싶은, 흥미가 당기는 일에 종사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원래 인류의 연구 대상은 인간 그 자체이다.”라고 끝맺는 이 말에서 반가움을 느꼈다. 바로, 인간과는 너무나도 동 떨어진 것 같던 공학이 나에게는 버거웠기에, 인간과 가까운 학문인 인문학이 그리웠기에.

이 부분이 다가와서일까? ‘친화력이라는 화학 법칙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러나 철저하게 인간사를 다루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화학법칙조차도 인간사와 연관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듯이.

화학시간에 배웠던 친화도를 잠시 떠올리자면, 아마 오틸리에와 에두아르트의 그 친화도가 대위와 샤로테의 그것보다 더 컸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오틸리에와 에두아르트는 성격상(한명은 어렸고 한명은 순수했다고 생각한다) 느끼지 못했던 도덕, 윤리라는 다른 요소가 대위와 샤로테의 친화도에만 영향을 끼친걸까?

1부가 드라마틱하고 사건 중심이었다면, 2부는 정적이고 사건들이 더디게 흘러간다는 느낌이었는데, 사실 그런 만큼 2부에는 오히려 이 많이 나왔다. 언뜻 네 사람의 관계가 다만 어디로도 흐르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 긴긴 2부의 앞부분은, 그러나 돌려보면 한 장 한 장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더불어 열띤 논쟁이 자리하고 있다. 친화력의 주된 내용은 부부와 그에게 영향을 미친 두 인물의 연애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저 단순한 연애소설에 그치지는 않고 풍부한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2부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 행간의 이야기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시대에 따라서 혹은 그때그때의 상태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시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다양한 위치의 사람들이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주위와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이 뚜렷이 보인다. 그리하여, 4명의 연인들뿐만 아니라- 그 공백 기간에 방문한 각기 다른 좌표에 서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인간사 전반을 담고 있는 듯 했고, 매우 인상 깊게 읽혔다. 물론 이 부분이 인상 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는 말들이 현대에 적용하기에도 그리 크게 무리가 없을 만큼 공감이 가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앞에서도 썼듯이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 중에 하나는 바로, 자유와 얽매임에 대한 조교와 샤로테의 대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은 어쩌면 도덕과 윤리가 인간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전체 주제와도 어느정도는 맞닿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즉 주변에 성과 참호를 쌓고 지켜졌던 도시가 점점 개방되는 형태로 나간다고 조교는 주장하지만, 샤로테는 그것이 지속되면 생산한 것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다시금 담을 쌓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경제적으로의 끊임없는 순환인 동시에, 끊임없이 구속과 자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한 개인의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의 비유가 현대에도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듯이 보였다.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유무역의 정도(FTA)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드는 생각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인간 속에 흐르는 그 어떤 본질은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등장인물들도 사실은 한쪽으로 기운 사람도 있는 반면에(에두아르트가 친화력에 이끌리는 사랑을 옹호하는 저 끝 편이라면, 결혼을 옹호하는 반대편에는 미틀러가 자리하고 있는 걸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중간즈음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괴테는 어느 한편을 꼭 옹호하기 위해서 글을 썼다가 보다는 이 윤리와 도덕, 그리고 자연스러운 감정의 이끌림 사이의 그 관계자체에 주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종의 의문제기랄까?

역시나 상황에 따라서 자유와 구속에의 갈망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어느 중간쯤에 서 있는 나는, 이 소설에서 누구의 편에도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누구의 편에서든지 맥락을 통해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다만, 에두아르트에 대해서는 좀 더 이해해 줄 수 있는 폭이 더 좁아지는 것은, -그가 자유 연애를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그가 상황 상황을 너무도 쉽게,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르고야 말거라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순수한 마음이 너무 안일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가,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 현저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물론 그가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그를 아주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혹은 너무나 보수적인 미틀러 역시 그다지 정이 가지 않을 것을 보면 나는 단순히 너무 한 극단에만 치우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