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굴, Der Bau, 독일 문학, 독문학

카프카, 굴

<>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굴을 판 주체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작품 역시 다른 카프카 소설에서 느꼈던 그 어떤 어두침침하고 어두우면서도 매우 이성적이라고 느껴지는 정제된 공기가 흐르는 문체가 그대로 녹아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더욱 흥미를 끌었던 것은, 주인공의 생각 하나하나를 함께 파고 들어가면서 어느새 내가 그 굴을 판 가 된 것 같은 착각조차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실 그 굴을 판 주체가 구체적으로 어떤 생물인지는 정확하게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짐승(?)의 내쉬는 숨 하나하나, 시야,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 등이 전해졌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 자기 자신은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거울이라는 좌우를 왜곡시키는 사물을 통해서, 혹은 나와 비슷한 다른 생물을 통해서 내 모습을 짐작해 볼 뿐이다. 그러니 어쩌면 철저한 1인칭 시점에, 견주어 볼 수 없는 다른 비교대상조차도 나오지 않는 이 외로운 생물의 모습을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은, 모든 생물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모르는 것 만큼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처음에는 사실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읽었지만, 행간 구석구석에서 , 이거 사람이 아닌가?’, ‘그럼 두더지?’, ‘혹은 그 어떤 짐승인가?’하는 다른 의문을 낳게 되는 구절들이 종종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 굴 안에 전구를 밝혀 놓았을 리는 없을 터이니, 적어도 이 글의 화자가 표면이 이렇다등의 묘사를 볼 수 있었다.’고 가정할 때 어두컴컴한 곳에서도 시야가 밝을 수 있는 생물일 것이다. 작업은 손톱과 이마를 이용해서하는 듯 하고...

그러나 끊임없이 내가 이 생물에 대한 추측을 사람 혹은 그와 비슷한 부류로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이 짐승의 사고과정이나 혹은 사용하는 언어 체계가 바로 사람의 그것이 아니고서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짐승과 더불어 정말 굴을 파고, 어두침침한 광장에 누워서 고요를 즐기고, 함께 고민했다고 느낄 정도로 이 소설의 자세한 묘사들이 소름끼치게 피부에 와 닿았던 것은 사실이다. 왠지 정말 성곽 광장으로 부터 풍겨져 나오는 무수한 쥐들(식량들)의 시체냄새를 맡기라도 한 듯 한 기분이 들어서 한동안 읽기가 겁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이토록 선명하고 피부로 와닿는 이미지와 묘사는 이 소설이 가진 특별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가오는 그 이미지가 무척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에 오히려 범접하기 힘든 매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하여 ’. 이 짐승이 뿌듯해하면서 지었던 이 건축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사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늘 정답은 열려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다만 내가 느낀 짧은 인상,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이자 자신이었다.

작품 속의 는 끊임없이 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굴은 곧 자신이며 굴과 자신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고, 때때로 굴속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가도 다시 굴로 돌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돌아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존재는 때로 자기 자신을 탈피하고자 몸부림치지만, 결국 또 그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듯이, 그렇게. 어쩌면 굴을 판다는 행위 그 자체가 자신 안으로 침잠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굴을 파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깊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굴에 쏟은 노력과 시간, 마음은 어느새 자기 자신과 분리할 수 없게 되어, 자신의 창조물이 어느새 자기 자신이 되고 마는 그런 순환의 고리를 느꼈다. 그리하여 굴 밖에 나가서 입구에서 며칠간 지켜보면서 자신의 굴이 안전한가를 점검하는 것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대한 대비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기도 한 굴을 한없이 밖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나르시즘의 정수를 보는 듯한 생각도 들었다.

그 나르시즘은 사실 소설 곳곳의 흡족감과 자화자찬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가 모든 행동을 철저히 이성을 바탕에 두고서 치밀하게 계획하면서 하는 사고의 과정이 특히 인상적이다. 하루하루의 생활과 하나하나의 행동을 세심한 통제 속에서 절제하며 하고 있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감성에 치우친 행동을 뒤에서 은근히 조소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 굴은 세상 온갖 타락과는 단절된 이성적이고 규칙이 존재하는 온전하고 안전한 공간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굴이 자신만의 논리가 지배할 수 있는 단절된 자아만의 세계라는 점과도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온갖 타자와 끊임없이 접촉해야 하는 세계는 이성만의 원리만으로 지배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굴이 입구를 통해 외부세계와 접촉되어 있는 만큼, 자아는 언제나 외부에 노출되어 위험에 놓여있다. 위험을 피해서 점점 더 깊게 파들어 가지만 입구를 막음으로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할 수도 없다. 급기야 그 위험한 외부 세계로 가끔은 뛰쳐나가곤 한다. 그 돌고 도는 고민과 삶의 아이러니. 온전히 속에 있을 수도 있고 밖에 있을 수도 없는 그런 곳이 바로 굴이 아닌가 싶다. ‘은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지키고 고수할 수밖에 없는 자아이며, 동시에 어디에나 쉽게 노출되고 위협받을 수 밖에 없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러한 굴 내부에 위험이 찾아온다. ‘사각사각 소리라는. 그 소리의 정체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 소리는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침잠하는 소리일까? 혹은 이 짐승의 환청일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는 그것을 자신과 비슷한 굴을 파는 어떤 다른 자로 인식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이 사고 자체가 에 대한 그의 기존의 생각을 뿌리 채 흔드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굴을 위협하는 것은 외부에서 뿐 아니라 끊임없이 내부에서도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굴을 파도, 혹은 굴 밖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모든것은 언제까지나 변화되지 않은 채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외에도 이 다양한 각도로 해석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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