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브레히트, 연극, 희곡
- 책, 독서, 서평
- 2022. 8. 6.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원작 희곡
역시 공연을 보고 희곡을 보아서 빨리 읽혔다. 희곡만 먼저 보았으면 잘 상상이 안 갔을 장면들도 더욱 생동감 있게 머릿속으로 그리며 읽을 수 있었다.
한국적으로 번안되었던 공연을 보고 나서 너무나도 궁금했던 원작. 남북전쟁으로 번안되어 있는 이 극의 원래 배경은 30년 전쟁이었다. 공연을 보며 막연히 동독과 서독 사이의 전쟁얘기가 아닐까 예상했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즉 동서 대립,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다룬 것이 아니라 종교전쟁, 구교와 신교의 대립이 그 중심축인 것이다. 역사적 무지함으로 인하여 30년 전쟁의 간단한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찾아보고 희곡을 읽었다. (그럼에도 아직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은 수업시간에 보충해야 할 듯.)
원작 희곡을 보니 역시 느꼈던 대로 한국 공연에서 약간 더 ‘극적 몰입을 위한 요소’를 살린 듯 하다. 단적인 예로 3막의 둘째아들이 죽는 장면에서, 희곡은 다만 억척어멈이 머리를 흔든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번안극에서는 “모른다”라는 대사를 억척어멈이 함으로써 극중 억척어멈의 심정에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생겼던 것 같다. 흥정 과정에서 값을 내렸다가 흥정이 깨지자 값을 다시 올리는 장면은 생략되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여서 그랬을까? 그 대신 역시 매우 극적으로, 둘째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총소리가 삽입되었다. 이것은 다음날까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원작의 장면과 사뭇 대조된다. 또한, 생소함을 주면서 다소 생뚱맞은 느낌이 드는 노래들 역시 좀더 극적으로 다듬어져서 삽입되었다고 생각한다.
원작과 비교되는 번안극의 시도들이 새삼 돋보였는데, 억척어멈이 돈을 깨물어서 확인해보는 장면은 돈을 빛에 비추어보는 다소 코믹한 동작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베트를 사투리 쓰는 여성으로 등장시킨 것은 그녀의 캐릭터를 살려주는 매우 유쾌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원작의 이들도 지방에 따라 다른 말을 할까?) 그리고 한국 전쟁의 맥락에서 억척어멈을 보았던 것은, 우리에게 가깝고 공감이 가는 소재였던 만큼 매우 의미가 있었지만, 종교전쟁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빛을 발하는 대사들이 행간에 숨어있음을 발견한다. 적어도 그들은 ‘동족간의 혈육전’이 아닌 ‘신을 위한 싸움’이라는 명분으로 인하여 ‘영광스럽게 죽는다’는 말을 할 수 있으니. 그리고 오히려 그런 점이 무언가 톱니바퀴가 묘하게 어긋난 듯한 전쟁 상황의 아이러니를 더 부각시켜 주는 것 같다.
공연을 볼 때도 느꼈지만, 각 장마다 미리 이야기하는 줄거리 소개가 흥미롭다. 스토리를 알고 보더라도 ‘그래서 그 일이 과연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이 생기는 장치인 듯 하다. 특히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서 그녀는 아들을 잃는다.’라고 하는 다른 작품에서라면 가히 ‘스포일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굵직굵직한 전달과 더불어 ‘여기서 그녀는 수탉을 한 마리 판다.’ 같은 얼핏 사소한(?) 정보가 같은 중요도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실 ‘여기서 그녀는 셔츠 네 벌을 잃는다.’와 ‘여기서 그녀는 자식을 잃는다.’가 동등한 꼴로 서술되어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장사와 아이들이 어쩌면 동격이 아닐까 싶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이 자체로 한쪽으로 장사하는 동안에 다른 한쪽으로 자식들을 하나 둘 씩 잃는 억척 어멈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아니, 극을 보면서 오히려 그녀가 자식들조차도 ‘마차를 끌기 위한 존재’로 여기는 듯 하다고 느꼈다면 너무 심한가?
사실 연극을 볼때 어느정도는 억척어멈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봤던 것이 사실이다. 희곡을 읽을 때 그 마음이 조금 덜 했던 것을 보면, 그건 공연에서 억척어멈의 인간적인 면들을 약간 더 부각시킨 면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떠나서도, 그 연민은 억척어멈을 옹호하고 억척어멈이 하는 행동이 옳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편으로는 그 모든 책임을 억척어멈에게만 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억척 어멈도 어쩌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자 희생양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전쟁이 억척을 만들었고, 억척 같은 인물은 전쟁을 지속시킨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전쟁으로 인해서 억척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자기도 모르게 잃는, 이 기막힌 구조에서, 전쟁을 옹호하며 지속시키는 억척을 쉽게 비난하지 못하겠다. 그녀를 있게 한 것은 또한 전쟁이기도 하기에. 그녀는 그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모르는 무지로서, 전쟁을 돕고 옹호했던 것은 아닌지... 사실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비극성은 억척은 자기 자식이 죽는 장면을 눈앞에서 단 한명도 목격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자신을, 혹은 자신의 가족들을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그 사회 논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자신이 결국 자신의 숨통을 옭아맨다는 것을 모르는 것, 사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 아닐까.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연극, 번안극 후기
감상문을 써야하는지 몰라서, 그만 시간이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네요.
보고 나서 기억이 생생할 때 썼어야 하는데, 벌써 그사이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조금은 그 기억이 옅어져서 아쉽습니다.
감사하게도 VIP석에서 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의문거리, 모든 것을 다~떠나서. 일단 엄청난 감동을 했던 공연이었다는 사실을 꼭 밝혀두고 싶다. 연극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오랜만에 이렇게 멋진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에 정말 감사한다. 조금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공연을 보는 내내 ‘연극계의 미래’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뮤지컬이 대세인 듯 해 아쉬웠던 요즘, 연극 역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무쌍하게 연구되고 발전하고 있음을 눈앞에서 실감했다.
섬세한 번안, 자연스러운 연기와 대사처리 하나하나, 안무, 연주, 무대, 조명, 음향과 라이브 음악들까지 어울어진 무대는 이 공연이 그냥 몇 달 잠깐 연습하고 올라온 공연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아니, 이미 이 공연은 다듬어지고 다듬어진, 이제 그 다듬기의 마지막 과정을 밟고 있다고 해도 좋을 완성도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공연이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고 느꼈다. (물론 공연이라는 것은 몇 년을 해도 또 그 속에서 찾을 것이 있다는 것이 묘미겠지만) 예를들어 억척어멈이 늘 돈을 살펴보는 행동의 반복 등의 디테일은 그 자체로 캐릭터의 성격을 만들어가기에 충분했다.
공연이 끝나고서 배우들과 더불어 질문을 주고받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니, 감히 질문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시간이 '공연 어떻게 보셨어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었다면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해도 부족했을 시간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장 높이 사는 것은 무엇보다도 번안이다. 물론 아직 브레이트의 원작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정말 대체 어떤 대본이 길래 이다지도 우리 정서에 맞게 번안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친숙한 이야기, ‘아침에는 국군이 됐다 저녁에는 빨갱이가 되는’그 현실. 이건 동화 속 이야기도 옛날이야기도 아닌 몇 십년 전에 틀림없이 실제로 벌어졌을 ‘진실’이다. 그러나 이미 기억 저편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그 진실이, ‘연극’이라는 무대에서 ‘연극적 진실’로 다시 되살아 난 것이다.
극의 효과 중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창과의 만남이다. 국악 조의 대사들이 여기저기서 자연스럽게 넘실거리고, 마음의 고조는 창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접목이 얼마나 한국적 정서와 어우러지면서 무대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듯 했는지! 다듬어진 자연스런 사투리 대사들과 억척어멈의 점치기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극적’장치들...
생생한 라이브 음악과 국악과 가끔 어우러지는 러시아풍의 곡조들(이것은 셋째와 관계가 있을까?) 무대 위는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공연이 얼마나 마음을 울렸는가에 대해서 쓰라면 아마 밤을 새고도 모자를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는 그런 감상만을 쓰는 자리가 아니니 이쯤에서 각설하고.
(각설하기에는 사실 사설이 길었지만)
브레이트의 공연은 대본만 보았었지, 직접 공연장에서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관심이 갔다.
소위 말하는 '소외 기법'을 써서, 극에 몰입을 방지하고 그럼으로서 극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는 브레이트의 '서사극'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무척 궁금했다.
사실, 그 '소외 기법'의 표현에 있어서는 기대한 것 보다는 좀더 극에 몰입하게 되는 '보여주는'공연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그런 것은 핀 조명의 활용 등에서도 두드러졌다. 어쩌면 이런 부분은 브레이트의 의도와는 반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외 기법'을 정말 심하게 한 경우에는 배우들 등퇴장까지 다 보여주고, 아예 객석의 불을 켜고서 공연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극이 시작하기에 앞서, 아직 객석 불이 환했던 상태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시작했던 것이라든지, 각 장이 시작되기 전에 그 장의 주요한 내용을 먼저 글로 보여준 점 등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줄거리를 미리 알고 공연을 보는 경험은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는데, 그것이 ‘알고 보는 지루함’이전에 ‘그래서 이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까?’라는 새로운 호기심으로 발전하는 것을 느꼈다. 브레이트가 의도한,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생각하며 보게 하게끔 위한 장치’가 조금 다를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구현된 것은 아닐까.
사실 공연을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원작을 어떻게 번안했을까? 하는 점이다. 독일에도 우리의 아침 다르고 밤 다르던 동족간의 살육 극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런 점들.
억척어멈, 우리는 그녀를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자식이 눈앞에 있으면서도 ‘모른다’라고 이야기하는 그녀, 자식을 의지와 상관없이 군대에 보내고 받은 돈을 꼼꼼히 세던 그녀, 그때그때 다가오는 남성들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유혹하고 붙들어 메고 함께 사는 그녀를. 그녀를 몰고 가는 시대적, 상황적 냉혹함과 현실은 늘 있었고, 그리고 그녀는 그때마다 더욱더 냉혹하게, 억척스럽게 이를 악물고 그래도 살아가지 않았던가. 그 억척스러움을 어느 단계에서는 이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리고 한편으로는 같은 연희단 거리패의 작품인 <바보각시>가 떠오른다. (그래, 연출이나 무대장치등이 너무나도 낯익다 했더니, 이제 보니 바로 ‘바보각시’에서 봤던 그것이었다!) 찌든 세상에 발붙일 수 있도록 몸을 내어주고 그들 속에서 죽어간 바보각시와, 세상논리에 편승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세상과 억척스럽게 맞서는 억척어멈의 이미지는 얼마나 대비되던가!!)
전쟁은 벌어지지만, 그 속에서도 사는 사람은 살아야 한다. 전쟁은 종식되어야 하지만, 전쟁으로 먹고사는 군인들, 억척어멈의 마음 한편에서 ‘전쟁이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역시 간간히 내비쳐지기도 한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고 있으면 그저 답답하다.
괜히 얼마 전에 여성학시간에 보았던 여성 할례 비디오가 겹친다. 할례가 이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렇게 돌아다니며 할례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란다. 그네들이 옳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겠지만, 그 누가 당당히 그네들보고 당장 굶어 죽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어떤 힘이 생존을 위해 계속하는 그네들의 행렬을 막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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