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A 호프만, 모래사나이 신기하게도 보면 볼수록 인상이 달라지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사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쪽 이야기를 쓰려면 다른 줄기의 이야기가 걸리고,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서 맥락이 없어지고 있다. 그런 것들을 비록 글로 잘 정리는 못하겠지만, 정말 이 짧은 소설은 오만가지 잡생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풍부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읽으면서 ‘인형을 사랑하는 남성’ 모티프와 코펠리우스라는 이름을 어디선 가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생각해보니 발레 였다. 가 호프만의 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를 가장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만드는 인물은 코펠리우스라고 생각한다. 도대..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작품을 분석하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두서없이 여기저기서 몰려들어 한 줄기로 뭉쳐지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토니오가 작품 중에 얘기했듯이 ‘너무 많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서 느끼면, 그걸 겉으로 표현하는 것은 진부해지고 정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멀찌기 떨어져 비판적인 시각으로, 혹은 날카롭고 섬세하게 이 작품을 뜯어보는 것이 공부겠지만, 아직 미숙한 나는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으면 그걸 굳이 칼로 재단하고 싶지 않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작품의 구조나 짜임, 말하고자 하는 주제 등이 내가 작품을 즐겁게 읽는 데 있어서 멋진 양념이 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정말로 -토니오의 말을 빌려- ‘가슴을 치는 무엇’은 그런 외적..
카렌 두베, 폭우 폭우,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겹게 내리는 비는 집을 조금씩 좀먹어 간다. 탈수제를 뿌리고, 도랑을 파고, 필사적으로 물로 인한 피해를 막아보려고 애쓰지만 물은 조금씩 조금씩 집을 잠식해 가고 급기야 무너트린다. 이 집의 모습은 어딘지 레온과 마르티나의 모습과 닮아 있다. 자신에게 처해진 삶에서 버둥거리지만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는, 혹은 버둥거릴수록 스스로를 옥좨는 그들의 삶과 말이다. 소설 전반을 덮고 있는 지릿한 비. 생명과 죽음의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물은 이 소설에서는 끊임없이 퀴퀴한 냄새와 함께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장 처음 ‘물’과 관련되어서 등장하는 것이 ‘익사체’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생명체’의 흔적을 느낄 수 없는 퉁퉁 불은 살덩어리. 그..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원작 희곡 역시 공연을 보고 희곡을 보아서 빨리 읽혔다. 희곡만 먼저 보았으면 잘 상상이 안 갔을 장면들도 더욱 생동감 있게 머릿속으로 그리며 읽을 수 있었다. 한국적으로 번안되었던 공연을 보고 나서 너무나도 궁금했던 원작. 남북전쟁으로 번안되어 있는 이 극의 원래 배경은 30년 전쟁이었다. 공연을 보며 막연히 동독과 서독 사이의 전쟁얘기가 아닐까 예상했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즉 동서 대립,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다룬 것이 아니라 종교전쟁, 구교와 신교의 대립이 그 중심축인 것이다. 역사적 무지함으로 인하여 30년 전쟁의 간단한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찾아보고 희곡을 읽었다. (그럼에도 아직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은 수업시간에 보충해야 할 듯..
괴테, 친화력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정말 즐거움을 주었던 부분은 2부 7장의 오틸리에 편지이다. 공대를 박차고 나와 인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인문대로 옮겨온 내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으로도 이 소설이 나에게 준 기쁨은 컸다고 할 수 있다. (너무 국지적이지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차피 책이라는 것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어야 또 즐겁게 읽기 마련이 아닐까?) 자연과학에 태한 탐구는 그 자체로 존경받을만하고 멋지지만,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채 멀리서 진행되었을 때 그것은 또 얼마나 낯설 수 있을지. 정말 내 더욱 마음을 울리는 것은, 생물들의 형태를 조목조목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한편의 시 일수 있다. 물론 이 일기에 써..
카프카, 굴 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굴을 판 주체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작품 역시 다른 카프카 소설에서 느꼈던 그 어떤 어두침침하고 어두우면서도 매우 이성적이라고 느껴지는 정제된 공기가 흐르는 문체가 그대로 녹아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더욱 흥미를 끌었던 것은, 주인공의 생각 하나하나를 함께 파고 들어가면서 어느새 내가 그 굴을 판 ‘내’가 된 것 같은 착각조차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실 그 굴을 판 주체가 구체적으로 어떤 생물인지는 정확하게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짐승(?)의 내쉬는 숨 하나하나, 시야,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 등이 전해졌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 자기 자신은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거울이라는 좌우를 왜곡시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지금은 민주주의 사회로, 누구나 크레온의 ‘국가는 통지자의 것으로 간주되며, 그의 말에는 무조건 복종해야한다’는 식의 경직된 사고를 들으면 그릇되었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 권력은 어디까지 개인을 통제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은 아직까지 경계가 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티고네’를 보며 한 가지 느낀 것이 있다면, 자연의 섭리내지는 사람들의 관습을 통제하는 것은 그 개개인에게 억압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물론 그 행위가 타인에게 피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 헌법에서 이야기하는 자유는 이러한 믿음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오라비 폴뤼네이케스를 저승길이 편안..
소송, 카프카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소송’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K는 어느 날 이유도 모르는 채 소송 당했다. K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소송당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가볍게 넘긴다. 그러나 소송이 진행되면서, K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신이 왜 소송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무죄가 될까. 어떻게 하면 소송에서 이길까.’를 생각하게 된다. 이 생각 속에서 이미 ‘자신은 소송되었다’라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 ‘소송’이라는 틀 속에 갇혀있는 K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K가 만나는 사람들 역시, ‘소송’을 해결해주기보다는 더욱 ‘소송’에 얽매여들게 만들어버리게 되는 존재들로 보인다. 뷔르스트너-정리의 부인-레니로 이어지는 K가 만난 여성들을 보면, 뷔르스트너 양은 소송에 대해..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나는 공연을 두 번 보았다. 한번은 유명한 임영웅 연출의 산울림 소극장 공연이었고, 또 하나는 off대학로 공연이었다. 을 쓴 보르헤스는 사무엘 베게트의 이 작품이 길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1막과 2막의 구성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1막과 2막의 동일하면서도 조금 다른 이 구성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작품이 일반적인 소설이 아니라 상연을 목적으로 한 희곡이라는 점이다. 물론 책으로서 이 작품을 읽었을 때에도 공감이 가는 많은 대사들과 내용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지만, 역시 공연으로 보았을 때의 즐거움은 글줄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두 공연을 비교해보기만 하여도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있다’라는 것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것은, 순간순간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는 이에 대한 대답을 ‘의식’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는 ‘내’가 진정한 ‘나’의 모습인가. ‘나’는 고정된 실체인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인가. 순간순간의 다른 기억의 단편들 속에서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나’로 엮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끊임없이 머릿속을 떠다녔던 생각들이다. 찰나의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생각들이 오간다. 어떤 고민을 할 때조차 나는 의식적으로 일관된 어떤 것을 ..
보르헤스, 픽션들 은 제목 그대로 허구이다. 이 작품은, 가상의 작가의 가상의 작품에 대한 논평, 가상의 공간, 가상의 인물에 대한 전기 등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는 모순적이면서도 정답이 없는 문제들을 짚어나가는, 통찰력을 읽을 수 있었다. 작품들은 연관이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개별적이었다. 많은 의문점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던 단편들 속에서 다가왔던 하나의 질문은 ‘인식’의 문제였다. 픽션들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짐짓 낯설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낯섦’속에서 역으로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돌아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백과사전을 통해 만들어진 ‘틀뢴’이..